2011/04/14 09:17

근황 110413 (비)일상



01몇주 전에 여기서 같이 공부하는 형과의 대화. 요즘은 밥먹고 설계만 해요. 그렇지. 그래도 아직은 밥은 먹어요.

02그리고 이제 슬슬 포기하는 것들이 늘어간다. 교수님 크리틱 있던 어제는 밥도 못 먹었다. 잠은, 사흘동안 네시간 잤다. 그러니까 일요일날, 그래 마지막으로 많이 자두자. 큰맘먹고 네시간을 잤다. 정말 네시간 자고도 많이 잤다고 생각하는 상황이라니. 그리고 그 후로는 일초도 못잤다. 화요일 밤까지.

03요즘의 취리히 날씨는 천국이 따로 없다. 바야흐로 아름다운 계절이다. 아침에 내방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그야말로 홍수 같아서 두꺼운 커탠을 쳐 놓아도 그 빛만으로 방이 밝아질 정도이다. 새들은 해가 뜨기 전부터 하루의 시작을 지저귀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에 쫒기며 일할때면 그 아침이 오는것이 참 뭐랄까 지긋지긋하다. 아니 아직도 할 일이 태산같은데 벌써 아침이라니. 뭐 사실 그리 낮선 느낌은 아니다. 서울에 있을때도 종종 그랬었다. 하지만, 이 기적같이 아름다운 아침과 나와의 관계설정을 이런식으로 해야 하는 상황은, 뭔가. 슬프다.

04그렇게 고생고생 일하면서 가져간 작업. 크리틱. 그래도 이번 크리틱은 말을 많이 안해서 좋다. 내가 안되는 독일어로 이래저래 말할 필요가 없이 내가 만들어낸 그림이, 그려간 도면들이 모두 말을 해주기 때문. 뭐 일반적으로 여기서 작업할 때는 말을 별로 안하게 되어서 좋은 것같다. 아니 못하는 건가? 뭐 어쨌든. 한국에 있을때의 나는 그놈의 혀가 길어서 설계 프리젠테이션 할때 3정도를 해가고 7정도를 말로 때우는 타입이었다. 많이 해갔으면, 말도 많이한다. 비율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건축가는 건물로 말해야지 자기 혀로 말하면 안되는 것. 자기가 건물에 표현해낸 것 이상의 것들을 말로 하려는 태도가 그리 권할만한 것은 아니다. 할말 있으면 작품이 말하게 해야지. 건물에 건축가의 이빨을 테이프로 녹음해서 틀어놓을 것도 아니고. 여기서는 말이 안되니까 자연스럽게 말을 안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말 못하는 답답함은 다시 설계에 반영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이것이 그 자체로 읽혀서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건축이 스스로 이야기할까를 더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나의 경우는 거의 강제적으로 그렇게 되었지만, 상황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이 건축이 더 명확하게 말할수 있을까. 를 사무치게 고민하는 상황 같은 것은.

05뭐 크리틱은 좋게 시작되었다. Das ist Grandhotel! 이게 바로 그랑호텔이라고, 제대로 멋있게 했네, 라고 칭찬들이 이어지는 것이 불안하다. 역시 aber, 하지만 이 붙는다. 지금 해온 것은 너무 포스트모던하다고. 나는 고전들을 열심히 배껴 왔고 그냥 옛날 것을 만들어 갔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좋게 말하자면) 포스트 모던한 것이 된다. 좋게 말해서 포스트모던하다는 것은 이 반에서 좋은 말이 아니다.

06건물에 자기 얼굴을 부여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당연히 건축가의 수 만큼 있을 것이다. 이 반의 문제의식은, 건물을 표현(장식?굉장히 위함한 말일 수도 있지만) 하는데에 건축의 전통적인 요소-건축에서의 모더니즘 이후에 철저히 단절되어 온-를 어떻게 다시 이용할 수 있을까. 라고 거칠게 정리할 수 있겠다. 그리고 여지껏 내가 수업을 이해한 바에 의하면, 그런 장식들은 (원론적으로) 텍토닉, 즉 건물이 어떻게 구축되었는지를 드러내는 것. 으로써만 정당화 될 수 있다. 아니 생각이 나도 아직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글을 쓰면서도 혼돈이 오는데, 드러낸다기 보다는 암시한다는 것이 더 맞겠다. 이를테면, 노출콘크리트로 아주 미니멀하게 종이접기 같은 콘크리트 면을 만들어 내는 것도 하나의 건축적 표현 방식이라면, 이 건물은 여기에 기둥이 있고 여기에 보를 얹었다. 라고 나타내는 것도 하나의 표현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발자국 더 나가서 사실 거기에 진짜 하중을 담당하는 기둥이 없더라도 여기에 진짜 기둥이 있다. 라고 말하는 것도 하나의 표현 방식이다. 뭐 안될 것은 없는 것이다. 그 표현 방식이 건물의 전체적인 인상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다면. 그리고 [바로 그 방식]은 사실 그리스 신전 이래로 수천년간 인간이 건축을 생각할 때 당연하게 사용해왔던 표현 방식이다.




07지금의 입장에서. 대망의 21세기를 숨쉬는 건축가로서. 결국은 재해석이고, 문제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이다. 그것이 이 설계를 진행하면서 각자가 짊어지고 가야 할 가장 커다란 물음표이다. 그리고 나는 사실 그런 근본적인 질문을 근본적으로 우회해서 그냥 옛날 것을 만들어갔다. 스스로도 무슨짓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요소들을 사용해서 입면을 구성하는 것이 너무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이었기에 그냥 완전 빠져들어서 절제를 잃었다. (ㅎㅎ)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히는 것이 두려웠었나보다.

08뭐 이제 겨우 3주차일 뿐이고 다시 뜯어 고쳐야지. 내가 할 일은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것. 그리고 더 많이 정확해 지는 것인 것 같다. 아니 그것보다 근본적으로 나의 [태도]를 분명히 정리해야겠다. 싸워야할 상대 앞에서 우물쭈물하다가 빨리 나가서 싸우라고 등짝을 한대 후려맞은 것 같은 느낌이다. 심하게 낙천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자면, 일단 그럴싸하게 배꼈네,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사실 그정도 이야기 듣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ㅎㅎ정말이다)

09하여간 요즘은 이런 고민들을 머리 깨지게 하면서, 다시한번 모든 것들이 예전에 보던 그것과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거리에 나와서 건물을 보았을때. 그리고 특히 그 건물에 세월의 더께 깨나 수북할때, 전의 나였다면 그냥 멋있네, 정도로 막연하게 생각했었을 것들이 이제는 좀더 다양한 형용사로 나에게 다가온달까.

10힘들고 어렵고 흥미롭고 기쁘다. (그리고 졸립다)


덧글

  • 2011/04/14 14:4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서연 2011/04/16 03:39 #

    대화..! 저도 그런 생각을 했었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잘 지어진 건물은 말을 걸어 온달까요..? ㅎㅎ 저야 전공을 하고 있지만, 그렇게 느끼셨다니 역시 보통 눈썰미가 아니신 것 같아요. 저도 언젠가는 그런 멋진 건물들을 지을 수 있겠죠..? 아직 공부할 것도 너무 많고, 까마득해 보이기만 하는 길이지만, ㅎ 감사합니다,
  • 준영 2011/04/14 17:59 # 삭제 답글

    좀더 얘기햇으면 좋앗을텐데 퇴근하느라ㅋㅋ
    내 지금 딱 수준이 이걸 보고 멋있네 이정도 인거 같다...날좀 깨우쳐줘ㅋㅋ
    여튼 조만간 다시 얘기하자고ㅎ
  • 서연 2011/04/16 03:41 #

    예의 차리지 말고 잘근잘근 씹어줘. 대화가 절실하다. 어찌되었던 설계도서(ㅎㅎ)는 너한테 넘겼으니 크리틱좀 해줘. 뭐 근데 그 시점 이후로도 실시간으로 자라고 있기는 하다. ㅎ
  • 김계옥 2011/04/15 21:55 # 삭제 답글

    하루 24시간이 너무 짧구나 잠을 대신 자줄 수도 없고.... 효율적인 시간관리가 절실히 필요하겠네. 이 글을 올릴 틈을 냈다는 것이 놀랍구나 고맙다.
  • 서연 2011/04/16 03:43 #

    이때는 좀 극단적으로 바빴던 거고, 항상 이렇지는 않아요, 아직은 이것보다는 좀 덜한 정도..? 정말 시간관리를 잘 해야죠. 제가 참 못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도 좀 배워야 할텐데요. 사람이 나아지는 점이 있어야지.. ㅎㅎ
  • 손군 2011/04/16 11:11 # 삭제 답글

    오, 꾸준히 몰입하고 계시는 자세가 멋지네요!
    문득 아디다스의 러닝화 광고 문구가 떠올라요.
    '아름답고도 괴로운 이 순간을 사랑하니까'
    비록 날씨가 죽이는 봄날이지만 죽진 마십쇼. 화이팅ㅎㅎ
  • 서연 2011/04/17 04:28 #

    오래간만! 정말 아름답고도 괴로운 순간인것 같네 근데 사랑하는지는? 뭐 애증의 관계 같은건가.
    그나저나 엽서 쓰기 프로젝트는 이대로 세월의 저편으로...............
    일단 살아남는것이 우선 ㅎ

    잘 지내고 있지?
  • 문군 2011/04/19 08:51 # 삭제 답글

    지금의 모습이 왠지모르게 딱 '조서연이다' 싶은건 왜일까?ㅋㅋ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몸도 챙겨가면서 하그레이.
  • 서연 2011/04/20 05:26 #

    우리도 슬슬 십년지기가 되어간다 그러고보니.. ㅎㅎ
    그 사람이 어디 가겠나.
    몸 챙겨가며 해야지.. 걱정해줘서 고맙네 그랴.
    이렇게 한번 징징대고나니 더 열심히 해야할것 같은 기분이다 근데. ㅎ
  • JKCK 2011/05/05 09:37 # 삭제 답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거긴 가까운가요?
  • 서연 2011/05/06 23:52 #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고.. 확실한건 서울보다는 가깝다는 것..? 그나저나 요새는 어떻게 지내는교.. 한동한 뜸했다.
    여기저기 소문들은 들려오는데, 본인은 침묵을 지키고 있네. ㅎㅎ 뭐 하여간 내가 들은게 맞다면 진심으로 축하를 보냅니다.
    그래 너라도.. ㅠ
    다시는 이쪽 세상으로 돌아오지 말게. ㅎㅎ
    하여간 세부사항들이 몹시 궁금하니 조만간 소식좀 넣어주시압.
    근데 한국 뜬다는 소문도 있는데 설마 상트페테스부르크로 오는거냐..?
  • JKCK 2011/05/08 15:37 # 삭제 답글

    상트페테스부르크?
    러시아 제2의 도시
    도시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적.
    세계 3대 박물관
    지젤....
    왜 현대차는 여기에 공장을 짓는지.....

    다음주면 결정나니 연락할께요.ㅋ
  • 서연 2011/05/09 06:30 #

    사실 나한테는 너무 가보고 싶은 도시 중 하나인데, 지금 너한테 그럴런지는 잘 모르겠다. ㅎㅎ
    소식 기다릴게,
  • JKCK 2011/05/13 08:23 # 삭제 답글

    26일 갑니다.
    어디로?
    ST PETERS BURG

    OH MY GOD
    WHAT THE HELL SITUATION
    WHERE IS GOD
    WHAT A GIGERS GOD DAMN VOICE.

    지저스 철자는 모르겠네요.
    형하고 거리가 가까워진다 생각에
    대한민국에 원수들과 멀어진다는 생각에
    긍정적으로 시옷비읍.^
  • 서연 2011/05/14 05:46 #

    ㅋㅋ 웰컴 투 유롭. 너도 이제 유럽에서 나처럼 격조높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겠구나 ㅎㅎㅎ
    아 웃으면 안되는 분위긴데 난 왜이리.. ㅎㅎ
    결국 오게 되었구랴..
    근데 26일이면 너무 갑작스러운거 아닌가..? ㄷㄷ 이거 뭐 일상의 지각변동이구만.
    그럼 얼마나 오래 있는거냐, 너 보러 상뻬쩨르부르그 달려가야겠다. 방학때. 우리 같이 보드카나. ...
    (먼산)
    하여간 남은 기간 동안 한국 생활 정리 잘 하고.. (무신 시한부 인생같은 느낌이네)
    마음 잘 추스리고
    후...
    뭐 그래도 역사와 문화가 고고히 살아 숨쉰다는 유럽의 고도 아니것나..?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뭐 어디 중동 사막같은데 떨어지는 것 보단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 손현 2011/07/02 16:35 # 삭제

    뜬금없지만,
    지저스 -> JESUS
    마, 고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ㅋ
  • n 2011/05/20 19:17 # 삭제 답글

    취리히에서 공부하시는군요. 저도 취리히 사는데. :-) 낯익은 곳들 담은 사진 잘 보고 갑니다.
  • 서연 2011/05/21 05:06 #

    감사합니다 :) 여기서 공부하시나요..?
  • n 2011/05/24 21:04 # 삭제 답글

    아니요 저는 일해요. 요즘 날씨도 좋은데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서연 2011/06/06 08:32 #

    그렇군요, 블로그 종종 놀러와 주세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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